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문단 편집) === 내각 활동 === 상무원 장관으로 활동하면서 로이드 조지는 기업인들을 설득하여 노조의 대표권을 인정하는 한편 노사분규를 제어할 목적으로 [[노사정위원회]][* 오늘날 한국처럼 노-사-정이 처음부터 한자리에 모이지는 않았다. ~~역시 자유주의 신봉자~~ 일단 노동자와 사용자간의 협상을 거쳐 타협에 실패할 경우에만 정부가 개입하는 시스템이었다.]를 설치한다.[* 여담이지만 당시 독일 제국의 황제였던 [[빌헬름 2세]] 역시 로이드 조지의 이런 조치를 격찬했다고 카더라(...)] 이어서 새로 수립된 [[허버트 헨리 애스퀴스]] 내각에서는 1908년 재무부 장관으로 위치를 옮긴다. 당시 영국은 [[독일 제국]]과 [[건함 경쟁]]이 한창이던 와중이었는데 로이드 조지는 파격적이게도 '''[[드레드노트]] 전함의 군축과 이를 통한 복지 증대'''를 주장한다. 심지어 다음해인 1909년에는 당시로서는 생각도 못한 개념이었던 '''[[불로소득]]에 대한 징세'''를 주장하여서 영국의 상류층을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는다. 다만 로이드 조지의 이런 제안들은 당시 영국 정계에서는 지나치게 파격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특히나 [[영국 귀족원|상원]]을 차지하고 있던 야당 [[보수당(영국)|보수당]]의 격렬한 반발을 샀던 탓에 모두 무산되고 만다. 특히나 전함 군축 문제와 관련되어서는 야당 보수당이 '''"We want eight[* 당시 영국 해군법(영국 해군의 전력은 세계 2위 3위 국가의 전력을 합친 것보다 많아야 한다는 것을 핵심으로 하는 법.)에 의거하여 영국 해군은 8척의 드레드노트를 보유해야만 했다. 로이드 조지는 이 8척을 4~6척으로 줄이자고 주장.] and we won't wait."'''~~라임 오지고요~~이라는 슬로건까지 들고 격렬하게 반대했고 제국주의와 [[민족주의]]에 불타오르던 일반 대중들 역시 보수당의 슬로건에 크게 호응하면서 신나게 욕만 먹고 끝난다. 그래도 의의는 있었던게, 이를 계기로 자유당 정부에서 1911년에 예산안에 대해 상원의 거부권을 무력화하는 법안을 통과시켜[* 물론 상원에서 이 법안도 거부할 수 있었는데 당시 영국 보수당이 분열을 겪었고, 국왕인 조지 5세도 이 법을 지지해 상원에서도 통과될 수 있었다.] 영국 정치에서 하원의 우위가 확고해지고 민주주의의 진전을 이룩했다. 1914년 [[1차 대전]] 발발 이후에도 로이드 조지는 재무부 장관으로 재직하면서 전비를 조달하고자 고군분투한다. 그러던 중 전쟁 2년차인 1915년에 포탄 위기(Shell Crisis)가 영국 정계를 뒤흔든다. 이 시기 영국군은 포병 전력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는데, 포탄의 공급량과 질이 크게 떨어졌던 것. 애스퀴스 수상은 부랴부랴 탄약부(Minister of Munitions)이라는 새로운 정부 조직을 만들고 로이드 조지를 이 탄약부의 장관으로 임명한다. 탄약부 장관으로 임명된 로이드 조지는 군수물자의 생산 및 보급 과정에 있어 일대 개혁[* 전쟁 초반부에는 군 측에서 물자 생산을 담당하였는데 이것이 비효율의 극치였다. 그리고 로이드 조지가 군 인사들과 대판 싸운끝에 물자 생산을 철저히 탄약부 및 산업부의 통제 밑으로 두는데 성공한다.]을 단행하였고 이것이 효과를 거두면서[* 다만 몇몇 군사학자들의 경우에는 로이드 조지가 탄약성 장관으로 임명되기 전부터 이미 생산 과정에 대한 개혁이 진행되고 있었고, 로이드 조지는 [[알베르트 슈페어|그냥 잘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만 얹었다]]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로이드 조지는 이 시기 영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정치인이 된다. 1916년에는 전쟁부 장관(Secretary of State for War)이었던 키치너 경이 독일 [[유보트]]의 어뢰 공격에 사망하면서 로이드 조지가 이 자리까지 겸하게 된다. 1916년 7월 그가 전쟁성 장관을 맡기 시작했을 당시 전황은 암울했다. 막 시작된 [[솜 전투]]에서 영국군은 어마어마한 피해량[* 개전 첫날에만 5만 8천명의 영국군이 독일군 기관총 앞에 녹아내렸다.]을 기록하고 있었지만, 진격속도는 더디기 짝이 없었다. 이런 막장 상황에 빡친 로이드 조지는 [[더글러스 헤이그]]를 비롯한 영국군 수뇌부들에게 [[극딜]]을 퍼부었다. 그러나 이런 극딜과 간섭은 국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해군 장관 [[윈스턴 처칠]]이 주도한 [[갈리폴리 전투]]를 비롯하여 정치인들이 주도한 군사작전이 다 실패로 끝나자 영국 국민들 사이에서는 '제발 전쟁은 전문가에게 맡기고 니들 정치인들은 뒷바라지나 잘해라!'라는 분위기가 커져갔다.] 한편 영국 정계에서는 지지부진한 전황으로 인하여 총리 애스퀴스의 전시 수행 능력에 대한 의구심이 커져만 갔고, '''마침내 1916년 12월 로이드 조지가 파워 게임 끝에 애스퀴스를 사임시키고 영국의 수상이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